말복이 지났건만 무더위가 가시기는커녕,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까지 더해져 세상이 더욱 후끈 달아오른 요즘입니다.
장편소설이 굵직굵직한 구성에 호흡이 긴 이야기로 독자를 사로잡는다면, 단편소설은 압축된 구성에 호흡이 짧지만 다양한 인생의 단면을 맛볼 수 있다는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지요.
버스나 전철 안, 짧은 휴식 시간 동안 한 편의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장점도 무시할 수 없고요.
지난 번 포스트 <무더위를 서늘하게 식혀 줄 추천 공포소설 10선>에 보내 주신 열화와 같은 관심과 성원에 감사의 인사 드리며, 그에 보답하고자 이번에는 장편보다 더 섬뜩하고, 매력적인 공포소설 단편집 7권을 선정해 소개합니다.
1. <벽장 속의 치요>
오기와라 히로시 지음
9편의 수록작 중 두 번째로 실려 있는 <Call>의 마지막 문장처럼 오기와라 히로시의 단편집 <벽장 속의 치요>에서 맛볼 수 있는 공포의 맛은 가슴 싸하고 잔잔합니다.
졸지에 백수가 된 청년과 벽장 속 꼬마 유령과의 아옹다옹 동거기 <벽장 속의 치요>를 시작으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삼각 관계에 빠졌던 세 남녀의 이야기를 서술 트릭으로 풀어낸 <Call>, 결말에 이르러서야 이 소설이 왜 공포소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<어머니의 러시아 스프>, 살인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면도 의외로 유머러스한 <예기치 못한 방문자>와 <살인 레시피>, 간병을 둘러싼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갈등을 그린 <냉혹한 간병인>, 고양이처럼 변해가는 일가족 이야기 <늙은 고양이>, 유년 시절부터 남아 있는 추억과 상처를 그린 <어두운 나무 그늘>과 <신이치의 자전거> 등 9편의 단편들이 때로는 섬뜩하게, 때로는 잔잔하게 독자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킵니다.
특히 표제작인 <벽장 속의 치요>는 이 맛깔스런 단편집의 백미. 누구도 미워할 수 없도록 깜찍한 치요라는 캐릭터를 선보이며 이야기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깁니다. 부디 오기와라 히로시가 장편으로 다시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.
2. <나의 식인 룸메이트 -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3>
이종호, 황희, 우명희, 김종일, 신진오, 김준영, 전건우, 장은호, 엄성용, 신지수 지음
한국 공포 문학의 대표 작가 이종호를 필두로 공포문학 창작에 힘써온 매드클럽이 자신 있게 선보이는 열 가지 핏빛 엔솔로지입니다. 느닷없이 사람 잡아먹는 괴물과 동거하게 된 기구한 남자의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<나의 식인 룸메이트>를 필두로 유년 시절의 잊을 수 없는 공포(<노랗게 물든 기억>, <담쟁이 집>, <불>), 불안한 현대인들의 자화상(<공포인자>, <스트레스 해소법>), 자연의 급격한 변화 앞에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(<얼음 폭풍>, <붉은 비>), 열 길 물 속보다 알 수 없는 한 길 사람 속(<은헤>, <선잠>) 등을 테마로 한 이야기들이 다채로운 빛깔로 그려집니다.
강렬하지만 거칠었던 1권, 매끄럽지만 다소 밋밋했던 2권에 비해 이번 3권은 재미와 완성도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으로 보일 만큼 모든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 만듦새도 뛰어납니다.
최근 <한국 추리 스릴러 문학 단편선>이나 <한국 스릴러 문학 단편선>, <한국 환상 문학 단편선> 등의 단편선 출간이 이어지고 있는데, 그 역시 <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>의 조용한 성공에 힘입은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.
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지만 그 완성도에 대해서는 누구나 고개를 끄떡일 법한 멋진 단편선.
3. <스켈레톤 크루(상)>
스티븐 킹 지음
<스켈레톤 크루(상)>는 그의 단편 7편을 묶은 단편집입니다. 분명 상, 하로 나뉘어 있는 책을 굳이 상 권만 소개하는 이유는 단편집이므로 상 권과 하 권의 연계성이 없고, 하 권에 실린 이야기들보다는 상 권에 실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랍니다. 물론 하 권도 거장의 명성에 값하는 멋진 단편집임은 분명합니다.
태풍이 지나간 후 마을을 뒤덮은 정체 불명의 안개와 절망에 빠진 인간 군상들을 섬뜩하게 그린 <안개>부터 죽음을 부르는 원숭이 인형 이야기 <원숭이(위 책 표지에 앉아 있는 저 놈입니다)>, 호수에 뗏목을 타고 나갔던 대학생들이 맞닥뜨린 무시무시한 기름 막 <뗏목>, 마약만 가진 채 무인도에 표류된 주인공의 처절한 생존기 <서바이버 타입> 등 공포소설 본연의 기능에 충실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책 한 권에 담겨 있습니다.
특히 <안개>는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영화 <미스트(위 사진 중 오른쪽)>로 영화화되어 개봉되었으니, 원작과 비교해가며 감상하시면 더 각별한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.
4. <몸>
김종일 지음
한 영화감독에게 찾아온 작가가 원고를 주고 사라지고 영화감독이 그 원고를 읽으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액자식 소설이지요. 표지에는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지만, 엄밀히 말해 <몸>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람의 신체와 관련된 9개의 단편(<눈>, <입>, <얼굴>, <귀>, <머리카락>, <구토>, <몸>, <손>, <링반데룽>)이 큰 연관성 없이 수록된 단편집에 가깝습니다. 저는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에피소드 <귀>와 다이어트를 하는 여자의 이상 심리를 실감나게 그린 <입>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.
작가의 처녀작답게 단편들의 구성이 다소 도식적인 감이 있고, 가끔 이야기를 흐지부지 끝맺는 에피소드도 있고, 에필로그는 억지스럽기까지 하지만, 그럼에도 <몸>은 정교한 묘사와 섬뜩한 이야기, 날카로운 주제 의식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적인 단편집입니다.
<여고괴담>, <폭력써클>의 박기형 감독과 판권 계약을 맺고 영화화를 추진 중이라는군요.
5. <피의 책>
클라이브 바커 지음
책 띠지에 떡 하니 실려 있는 스티븐 킹의 추천사 그대로 클라이브 바커는 스티븐 킹과 함께 공포소설계를 주름잡던 작가이자, 영화 <헬레이저>의 감독, <캔디맨>의 기획자이기도 합니다. 씨앤씨미디어에서 <피의 책>과 <요괴 렉스>를 출간한 적이 있지만,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다음 권은 출간되지도 못한 채 절판이 된 지 어언 8년, 클라이브 바커 본인이 직접 고른 베스트 콜렉션 <피의 책>이 재출간된다는 소식은 십 년 가뭄 속 단비와 같은 낭보였지요.
<피의 책>은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<미드나잇 미트 트레인(위 사진 중 오른쪽)>의 동명 원작을 비롯해 총 9편의 공포소설이 실린 단편집입니다.
'모두가 피의 책이다. 어디를 펼치든 모두 붉다.'라는 책 서두의 경고(?)대로 피가 흥건하고 살점이 낭자한 단편들이 주를 이루지만, <야터링과 잭>처럼 구수한 동화 같은 이야기도 있고, <언덕에, 두 도시>처럼 SF의 색채를 띠는 단편도 실려 있답니다.
진정 걸쭉한 공포소설의 진국을 맛보고픈 강심장 독자에게 추천하는 걸작 단편집.
6. <어느 날 갑자기>
유일한 지음
PC통신이 유행하던 오래 전 하이텔 썸머 란에 발표되었던 동명의 시리즈물을 책으로 엮은 <어느 날 갑자기>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에 '어느 날 갑자기' 찾아올 수도 있는 무서운 일들을 총 5권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. 도서출판 느낌에서도 출간된 적이 있는데, 현재 서점에서 찾아볼 수 있는 책은 청어에서 출간된 버전입니다. 1권은 장편 분량의 <버려진 집>만 수록되어 있어서 단편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만, 이후로는 한 권에 적게는 두 편, 많게는 여덟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. <버려진 집>이나 <스티커 사진>, <먹는 자와 먹히는 자> 등 정통 공포에 가까운 공포소설이 있는가 하면, 2008년에 영화화된 <슈퍼맨이었던 사나이(위 사진 중 가운데)>나 <마라토너>처럼 훈훈한 휴머니즘이 짙게 깔려 있는 에피소드도 있습니다.
작가 자신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해 사건을 겪거나 해결해 간다는 방식이 독특하고, 대부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과 가깝게 다가간 공포소설입니다.
1998년 SBS에서 <스티커 사진> 에피소드를 납량특집 드라마로 방영한 적이 있고, 2006년에 <2월 29일(사진 중 세 번째)>, <네 번째 층>, <D-day>, <죽음의 숲> 등이 동시에 영화화되어 극장 개봉과 SBS 방영이 거의 동시에 된 적이 있지요.
좀 철 지난 감이 있고, 이야기의 완성도가 들쑥날쑥한 감은 있지만, 잠 못 드는 여름 밤, 무서운 이야기가 당길 때 주저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공포소설.
7. <ZOO>
오츠 이치 지음
책의 서두를 여는 <Seven Rooms>는 밀실에 감금된 유괴된 남매의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로 정통 공포소설에 가까운 이 단편집의 백미. 소통의 불능으로 서로에게 사라져가는 부부(<So-Far>), 실종된 연인이 부패되어가는 사진을 매일 받는 남자(<ZOO>), 감정을 갖게 된 안드로이드(<양지의 시>), 엄마에게 차별 대우를 받는 쌍둥이(<카자리와 요코>), 말로 사람을 조종하는 아이(<신의 말>), 아버지에게 추리소설 작가로 재능을 인정받으려는 아들(<혈액을 찾아라>), 두 개의 검은 옷장과 그에 관련된 살인(<Closet>), 시체로 집을 짓는 남자(<차가운 숲의 하얀 집>), 비행기를 납치한 재수생(<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>) 등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기괴하고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10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.
2005년에 다섯 편의 에피소드를 추린 동명의 옴니버스 영화(위 사진 중 오른쪽)가 만들어지기도 했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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남은 여름, 좋은 책들과 함께 시원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. ^^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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